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헨리 폰다 (문단 편집) == 정치 성향 == 진보적인 사람들이 많은 할리우드[* 사실 당대에는 세실 B. 드밀, [[제임스 스튜어트]], [[게리 쿠퍼]], [[월트 디즈니]] 등 보수적인 사람도 많았다. 오히려 매카시즘 이전에는 리버럴보다 보수 세력이 더 컸을 정도다.]에서도 매우 리버럴한 성향으로, 인종 문제에 깨어 있는 인물인지라 딸인 [[제인 폰다]]가 어렸을 때 자신의 앞에서 "니거"(nigger:깜둥이)라는 말을 쓰자 그녀의 뺨을 때렸다고 한다. 물론 당시가 1950~60년대인만큼 흑인 인종차별이 극에 달하던 시기였기에 오히려 헨리의 행동이 더 드물고 진보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훗날 제인도 리버럴한 성향을 띠고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과 인권 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전쟁 중인 적국의 수도 [[하노이]]를 방문해서 자국을 비난한 건 논란이 되기도 했으나 훗날 그 점을 사과하였다.[[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29755|관련 기사]] 특히 보수주의자인 [[존 웨인]]과 비견되는데, 존 웨인의 경우 참전하지 않아 겁쟁이 이미지가 박혔지만 헨리 폰다는 2차 세계대전에 친구 [[제임스 스튜어트]]와 함께 참전했기에 영웅으로 남았다.[* 다만 헨리 폰다의 자식들인 제인 폰다, 피터 폰다는 베트남전 반전운동을 하다가 이적행위를 한 적이 있어 비난받는 반면 제임스 스튜어트의 아들은 베트남전에 참전해 전사하는 등 애국적 면모를 보였기 때문에 많은 미국인들에게는 스튜어트가 영웅, 애국자 이미지가 더 많이 박혀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당시 이미 나이가 30대 중반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해군에 자원입대했다. "스튜디오에서 가짜 전쟁이나 치르고 싶지 않다"는 그다운 의기의 발로였다. 처음에는 구축함 USS 새털리 호(DD-626)에서 부사관으로 복무하였으며, 나중에 임관하여 태평양 전선에서 항공전투정보 장교로 중위까지 진급했다. 이때 동성 훈장도 받았다. 3년간 야전에서 복무한 뒤에는 예비역으로 전환되어 1948년까지 예비역 해군 장교직을 유지했다. 또한 매우 독실한 민주당원이기도 해서 민주당 후보를 지지한 적이 많다. [[폴 뉴먼]]과 함께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진보주의자로 평가받는다. [[제임스 스튜어트]]와는 평생지기로 아주 절친한 사이였는데, 제임스 스튜어트가 [[공화당(미국)|공화당]] 지지자였기 때문에 처음에 정치 논쟁을 하다 싸움이 나서 그 제임스 스튜어트를 '''일방적으로 패버렸다'''고.[* 이건 헨리 폰다가 언급한 것이 아닌 제임스 스튜어트가 지나가는 말로 '그때 내가 신나게 얻어맞았다네'라고 했다. 제임스 스튜어트가 키가 5cm 이상 더 크지만 아무래도 체격 차이가 나다 보니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싸움이 끝나고선 이래선 안되겠단걸 알겠는지 제임스에게 먼저 앞으로 절대 정치 이야기는 하지 말자고 하여 계속 친구로 지낼 수 있었다. 그래도 매번 선거철만 되면 정치 이야기가 아주 없진 않아서 서로 냉대하긴 했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